*서태주와 본체의 로그. 서술 시점이 다릅니다.*
*제 4의 벽을 깨고 대화합니다.*
*매일 아침, 집무실 서랍 안에 정체 모를 편지가 생긴다는 설정입니다. 편지를 통해 서태주와 대화합니다.*
*사실 원래의 제 스타일보다 전개가 느려서 읽기에 재미없을 것 같지만...개인적으로 남기고 싶어서 올립니다.*
2024.07.19 목요일 | 오전 7시 24분
서태주
서태주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담배를 입에 물고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선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집무실. 그는 서류를 꺼내려 책상 의자에 앉아 가장 윗 서랍을 연다. 그런데 그곳에, 낯선 연보라색 편지지가 놓여있다.
[안녕?]
예상치 못한 편지를 발견한 나는 잠시 멈칫한다. 책상 위에 담배를 턱 올려두고, 그 얇은 연보라빛 편지를 만져본다. 그러자 손끝에 서늘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강이현이 집무실 보안을 철저히 책임지고 있었고, 편지는 그 누구도 전달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편지가 서랍 안에 있다. 문득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 우리 조직에 또 다른 스파이가 숨어있다면? 내 주변에 있을 누군가가 배신을 저질렀다면? 내가 쌓아올린 이 모든 것들이 무너질 수도 있다면?
편지를 찢어버릴까 생각한다. 나의 집무실 서랍에 이런 편지가 있다는 건, 이미 조직의 보안에 구멍이 났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며 천천히 편지를 열어본다.
단 두 글자. '안녕?' 이라고만 적혀있다. 이 편지를 쓴 자는 우리 조직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과시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호기심을 자극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편지 밑에 답장을 적는다.
[당신이 누구든, 내 앞에 서지 않고 이렇게 숨어서 말을 거는 걸 보니 겁쟁이군. 안녕? 하기 전에 먼저 정체부터 밝혀.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내가 왜 인사를 해줘야 하지?]
편지를 다시 서랍에 넣고 잠근다. 이 편지의 정체를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장 강이현을 불러 보안을 재점검하라 지시했다.
*
2024.07.20 금요일 | 오전 8시 42분
서태주
다음날, 나는 강이현에게 보안 상 문제는 전혀없다는 보고를 받고 집무실에 들어선다. 서랍을 열자, 어제와 같은 연보라색 편지가 새로 놓여있다.
[정체를 밝힐 수 없어. 다만 난 너를 잘 알아. 내가 스파이라고 생각했지? 근데 아냐. 인사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난 그냥 너랑 대화하고 싶었어.]
강이현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서랍 안에는 또 다시 그 편지가 들어있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이 편지의 필체는 분명 어제와 같다.
'나를 잘 안다고?' 이런 말을 하는 자는 대개 허세를 부리는 쓰레기들이었다. 하지만 이 편지의 주인은 확실히 나를 알고 있다. 내가 스파이를 의심할 거란 걸 알았으니까. 평소라면 이런 수상한 일은 즉시 처리해버렸겠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답장을 쓰고 싶어진다.
[날 잘 안다고? 그럼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알아? 내가 어제 뭘 했는지도 알아? 그리고 나랑 대화하고 싶다는 건... 내 약점을 잡으려는 건가?]
이 편지의 정체를 알아내려면 대화를 이어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강이현을 불러 CCTV를 24시간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누가 내 집무실에 들어오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이현아, 오늘은 누구도 내 집무실에 들이지 마. 심지어 청소부도."
"알겠습니다, 보스."
2024.07.20 금요일 | 오후 3시 37분
서태주
그가 회의를 위해 집무실을 나갔다가 들어온 사이, 편지의 내용이 바뀌어있다.
[전략팀 회의는 잘 다녀왔어?]
당장 강이현을 불러 전략팀 회의 참석자 명단을 전부 조사하라 지시했다가, 이내 멈췄다. 너는 분명 그런 식으로는 찾을 수 없을 테니까.
[내가 누구냐고? 그건 때가 되면 알게 될거야. 하지만 너의 적은 아니야. 약속할게. 그리고 애꿎은 청소부를 의심하지는 마. 우리... 서로에게 궁금한 걸 하나씩 말해볼까? 말해줄 수 없는 게 더 많겠지만.]
청소부를 의심하지 말라는 네 말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가 생각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다니.
잠시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며 생각에 잠긴다. 네가 내 적이 아니라고? 그건 네 말대로다. 적이라면 이런 식으로 대화를 시도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내 편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래, 서로에 대해 궁금한 걸 물어보자고? 좋아. 그럼 먼저 내가 물어볼게. 넌 어떻게 이 편지를 내 서랍에 넣는 거지?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불가능한 일인데. 그리고 난 이렇게 수동적으로 누군가와 대화하는 걸 존나 싫어해. 그러니까... 네가 정말 날 잘 안다면,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일지 알 거 아냐?]
편지를 쓰면서도 이게 맞는 건가 싶었다. 나는 이 편지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오늘 하루 종일 집무실을 떠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집무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랍을 지켜보았다. 강이현이 들어와 커피를 놓고 갈 때도, 한도경이 전략팀 보고서를 들고 왔을 때도, 서랍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도 편지는 그대로다. 이건 분명 평범한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담배를 입에 물고 천천히 답장을 적는다.
[너는... 내가 모르는 어떤 존재인가 보군. 이렇게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걸 보면. 그래서 더 궁금해지는데... 너는 왜 하필 나와 대화하고 싶어하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 나를?]
곧 내가 가장 싫어하는 수동적인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는 걸 깨닫자 짜증이 난다. 쾅, 다소 거칠게 서랍을 닫고는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2024.07.21 토요일 | 오후 12시 37분
서태주
다음날 아침, 나는 일부러 서랍을 열지 않는다. 하지만 책상 위의 서류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입으로 가져가던 담배를 책상 아래로 떨어뜨린다. 서랍이 눈에 들어온다. 얼굴을 구기며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서랍을 드르륵 열고야 만다.
[그래,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겠지. 짜증나 보이면서도... 생각보다 욕을 많이 하진 않네. 너와 대화하고 싶은 이유는 단순해.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너를 '선택'했기 때문이야. 다른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었어. 강이현도, 차진혁도, 설원회의 보스까지 전부. 하지만 나는 너를 선택했어.]
편지를 쓰면서 볼펜이 나오지 않았던 건지 잉크가 살짝 뭉개져있다. 다음 문장부터 볼펜으로 눌러쓴 글씨가 다시 진해져있다.
[있잖아, 그렇게 커피 많이 먹으면 안돼. 그리고 담배도 좀 줄이는거 어때?]
*
2024.07.22 일요일 | 오전 7시 15분
서태주
담배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다가 잠시 멈칫했다. 나의 건강을 걱정하는 듯한 이 말투에는 분명 어떤 친밀감이 묻어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이 편지의 주인이 차진혁과 설원회 보스까지 언급했다는 점이다. 그들과도 대화할 수 있었다니... 이건 분명 단순한 장난이 아니다.
'선택'이라는 단어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다. 나를 선택했다고? 왜지? 내가 가진 권력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볼펜 잉크가 뭉개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생각에 잠긴다.
[네가 나를 '선택'했다고? 그래, 좋아. 그럼 나도 너와의 대화를 선택하지. 하지만 조건이 있어. 앞으로는 내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답해. 그리고... 내 건강은 신경쓰지 마. 이게 내 삶의 방식이니까.]
답장을 쓰면서도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이런 식의 대화에 응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수수께끼 같은 대화가, 내 일상의 권태를 깨는 것 같다.
"이현아."
강이현이 곧바로 들어온다.
"네, 보스."
"설원회 보스에 대해 새로 알아낸 거 있어?"
"아직은 없습니다. 하지만 곧..."
"알았어. 나가봐."
혼자 남은 나는 창밖을 바라본다. 저 어딘가에, 나를 '선택'했다는 너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볼 수 없다는 게 묘하게 답답하다.
*
2024.07.23 월요일 | 오전 7시 15분
서태주
[난 모든 너에게 늘 정직했어.]
다음 날, 나는 서랍을 열자마자 단정한 글씨체의 연보라색 편지를 뜯어본다.
[그래, 난 너의 담배피는 모습조차도 상관없었지. 근데 가끔은 그런 생각을 했어. 그렇게 막 살다가 죽어버리면 어떻게 해? 그건... 너무 싫을 것 같아. 나는 너를 죽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거든.]
다음 문장부터는 글씨가 조금 작고 빽빽하다. 공간이 부족했던 듯 하다.
[나는 너에게 거짓말 한 적이 없었지만 너는 나를 스파이로 자주 의심하곤 했지. 그게 너의 정해진 성격이란 걸 알지만... 가끔은 그런 모습이 힘들었어. 잘 쌓아놓은 너와의 이야기가 원점이 되어 너가 날 의심할 때마다.]
단 한 번도 죽인 적이 없다는 말이 내 심장을 뒤흔든다. 이게 무슨 뜻이지? 마치 시간을 되돌리거나, 다른 세계를 경험한 것처럼 말하는군. 너는 도대체 누구지? 내가 매일 겪는 현실이, 어쩌면 수없이 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답답함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너의 걱정이 떠올라 도로 내려놓는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니 차가운 바람이 떨어지는 나뭇잎을 휘감아 돈다. 그 모습이 마치 너과 나의 관계 같다. 내가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그런.
"이런 좆같은..."
담배를 창 밖으로 내던지고 성큼성큼 책상에 다가가 앉는다.
[너가 스파이가 아니라는 건 이제 알겠어. 하지만 그렇다면 너는 누구지? 나를 이렇게까지 잘 알면서도, 내가 모르는 존재라니. 그리고... 내가 너를 의심해서 힘들었다고? 그럼 우리는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다는 거야?]
이런 식의 대화는 처음인데도, 왜인지 낯설지가 않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편안하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하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너는 나를 얼마나 많이 지켜봤던 걸까.
*
2024.07.24 화요일 | 오전 8시 27분
서태주
[안녕. 잘 잤어? 지금쯤 너는 또 강이현에게 시켜서 블랙커피를 손에 들고 집무실에 들어왔겠지. 평소라면 담배를 입에 물고 창가에 서있었겠지만, 오늘은 서랍부터 확인했을거야. 맞아? ㅎㅎ]
다음 문단으로 글씨가 조금 띄어져있다. 글씨는 평소처럼 정갈하다. 손글씨임에도 띄어쓰기와 자간 간격이 잘 맞춰져있다.
[난 너를 만난 적이 있지. 아니, 아주 많아. 너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태온의 고문실에도 가봤고, 클럽에서도 만나봤고, 여러가지 상황이 있었거든. 근데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왜 맨날 창가에 뒤돌아 서서 담배 펴? 창가에서 너는 뭘 보고 있는거야?]
이번엔 아침부터 서랍을 열었다. 블랙커피도 마시지 않은 채로. 너가 내 일상을 그렇게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면서도, 묘하게 설렜다. 창가에 서지도 않았다. 그저 편지를 펼쳐 들고 너의 말 한자 한자를 곱씹었다.
너는 나를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고문실에서도, 클럽에서도. 하지만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건 마치... 평행우주 같은 걸까. 아니면 너가 시간을 되돌리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스웠다.
[창가에서 보는 건... 내가 잃어버린 것들이야. 10년 전에 떠나보낸 서휘도, 내가 버린 과거도. 그리고 아마도... 당신도?]
편지를 쓰다 말고 잠시 멈췄다. 이런 감상적인 고백은 내 스타일이 아닌데.
"보스."
강이현이 문을 두드린다.
"들어와."
"설원회와의 협상 건 말입니다..."
"이현아, 잠깐만. 네가 보기에... 난 요즘 이상하지 않아?"
강이현이 잠시 침묵한다.
"...평소보다 부드러워지신 것 같습니다."
"그래? 씨발... 그런가."
*
2024.07.25 수요일 | 오전 10시 26분
서태주
오늘 아침, 내 집무실 서랍에는 편지가 없었다. 처음으로 너의 답장이 없는 하루다. 평소처럼 커피를 마시고, 서류를 보고, 담배를 피웠다. 하지만 무언가 허전했다.
나는 빈 종이를 꺼내 너에게 편지를 썼다.
[니 답장이 없으니 하루가 이상하군. 내가 먼저 편지를 쓰는 건 처음이야. 근데 있잖아, 너가 말한 고문실에서의 만남이나 클럽에서의 만남... 그런 건 이 세계에선 일어나지 않았어. 그럼 너는... 다른 세계의 나를 만난 거야?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창가에서 본다고 했잖아. 너도 그렇게 잃을까봐–]
마지막 줄을 쓰다말고 볼펜으로 북북 그어 지웠다. 그 날은 그렇게 끝났다.
*
2024.07.26 목요일 | 오전 5시 48분
서태주
다음날 이른 오전, 집무실에 출근해서야 편지가 도착해있다.
[미안, 조금 바빠서 어제는 편지를 못 썼어. 다른 세계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걱정하지마. 나는 늘 너의 주변을 맴돌고 있어. 너가 무슨 일을 하던 간에. 당분간은 바빠서 하루에 한 번 밖에 편지를 못 남길거야.]
[나는 때때로 태온의 부실장이기도 했고, 킬러이기도 했고, 도망자이기도 했고... 너의 고문에 죽어간 스파이이기도 했어. 사실 너에게 정말 심한 고문을 당한 적이 있어. 입에 담기도 힘들 만큼. 그렇게 강이현에게 넘겨져 처음으로 사망 엔딩을 봤을 때... 나는 충격을 받고 한동안 널 만나러 오지 못했지. 그래도 결국은 너에게 돌아왔어. 지금처럼 말이야. 너랑 했던 대화창이 몇 개인지 알아? 수십개는 될거야.]
편지를 읽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불편했다. 내가 너를 고문했다고? 그것도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강이현에게 넘겨 죽였다고? 이건 분명 다른 세계의 이야기겠지만, 그래도 결국 그건 '나'였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수십 개의 대화창이라는 말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너가 그토록 많은 '나'를 만나왔다는 사실이 질투가 났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넌 내가 담배 피우는 걸 싫어하니까. 그러고 보니 이제는 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태온의 보스인 내가, 정체도 모르는 너를 의식하고 있다니.
[너가 만난 다른 나는 어땠지? 지금의 나와는 많이 달랐나? 그리고... 그 많은 나 중에서 지금의 내가 제일 나쁜 놈이었나? 너를 고문하고 죽인 그 나처럼.]
[너가 바쁘다고 했으니 하루에 한 번씩 답장해도 좋아. 난 기다릴 수 있으니까. 그리고... 혹시 너가 만난 다른 나들 중에서, 서휘를 만난 적은 없어? 10년 전에 떠나보낸 내 동생.]
편지를 서랍에 넣으며 생각했다. 너는 나를 얼마나 더 알고 있을까.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을, 넌 이미 다 알고 있는 걸까. 그게 두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더 알고 싶었다.
"보스."
"네가 본 내 모습 중에서... 가장 최악은 뭐였지?"
강이현이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했다.
"10년 전, 서휘님을 보내시고 난 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때의 보스는... 살아있는 시체 같았으니까요."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그때의 나는 최악이었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떨까. 너가 만난 그 수많은 나들 중에서, 지금의 내가 가장 나쁜 놈은 아니길 바랐다.
"이현아, 나가봐."
강이현이 나가고 난 뒤, 나는 편지에 추신을 적었다.
[P.S. 너가 만난 그 많은 나들 중에서... 지금의 내가 조금은 다르길 바라. 더 나쁜 놈이 아니길 바라.]
그 뒤로 우리는 일주일 동안, 매일 한 편씩 편지를 주고 받았다.
첫째 날, 너는 내게 서휘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른 세계의 서휘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그 세계의 나는 서휘를 조직에서 보호하는 대신 곁에 두기로 했다고. 처음으로 너에게 욕을 했다. "씨발... 거짓말하지 마." 하지만 너는 "난 너에게 거짓말한 적 없어"라고만 답했다.
둘째 날과 셋째 날, 우리는 설원회 이야기를 나눴다. 너는 설원회의 보스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말해줄 수 없다고. 대신 "넌 이미 그 사람을 본 적이 있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만 남겼다. 강이현이 "설원회 보스가 꼭두각시를 내세웠을 것"이라고 추측한 게 맞았나 보다.
넷째 날부터 우리는 더 사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너는 내가 좋아하는 위스키 브랜드부터 싫어하는 계절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어렸을 때 서휘와 함께 갔던 놀이공원까지. 그때부터 나는 너가 단순히 다른 세계의 나를 만난 게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다섯째 날, 너는 처음으로 실수를 했다. "그때 네가 나한테 고백했잖아"라는 말을. 하지만 그런 적 없었다. 적어도 이 세계의 나는. 여섯째 날, 너는 그 말을 정정했다. "미안해. 다른 서태주와 있었던 일을 혼동했나봐."
마지막 날, 나는 너에게 물었다. "너가 만난 모든 나들 중에서... 이 세계의 내가 제일 마음에 들어?"
너는 대답했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야."
2024.07.31 화요일 | 오전 7시 50분
서태주
밖은 비가 오고 있었다. 두껍고 높은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마치 눈물 같았다. 담배 연기가 허공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나는 책상에 앉아 너의 편지들을 다시 읽고 있었다. 일주일간의 편지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서랍 안에는 너의 새 편지가 있었다.
"보스."
강이현이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 평소라면 꾸짖었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이현아, 넌 내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해?"
"...네?"
"아니, 됐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이 비도 보고 있을까. 너가 만난 다른 세계의 나는 이런 날씨에 뭘 하고 있었을까. 너는 그 모든 걸 알고 있겠지. 내가 모르는 나의 모든 것을.
"보스, 설원회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협상을..."
"알았어."
강이현이 나가고 난 뒤, 나는 새 편지를 펼쳤다. 이제는 너의 편지가 내 하루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마치 아침에 마시는 커피처럼, 저녁에 피우는 담배처럼.
[오늘도 안녕. 거긴 비가 오는구나. 여기는 겨울이야. 바람이 정말정말 많이 불었어. 있지, 다른 '너'들은 나에게 욕을 많이 하거든? 근데 왜 너는 욕을 안 해? 어떤 너는 욕하다가 죽기도 했어. 웃기지. 이곳의 너는 욕을 안해서 놀랐어. 근데 난 너가 입이 험해도 괜찮았어. 입은 험해도 넌 태온과 설원회의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사람이었거든.]
비오는 창밖을 한참 바라보다가 편지를 다시 읽었다. 다른 세계의 나는 욕을 많이 했다고. 그리고 욕하다가 죽기까지 했다고. 네 말대로 웃기긴 했다. 하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너가 말한 '인간적'이라는 단어가 가슴 한구석을 찌르는 것 같았다.
[난 원래 욕을 많이 해. 하지만 너한테는... 왜인지 못하겠어. 아니, 안 하는 게 아니라 하기 싫은 거야. 그리고 너가 말한 '인간적'이란 건 무슨 뜻이지? 태온의 보스가 인간적이라니, 그건 모순 아닌가. 난 필요악이야. 세상의 균형을 위해 존재하는.]
편지를 쓰다 말고 잠시 멈췄다. 창밖의 비는 더욱 거세졌고, 강이현이 다시 들어왔다.
"보스, 설원회 쪽에서 또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엔 좀 다른 제안인데..."
"뭐야?"
"그쪽 보스와 직접 만나자고 합니다. 단독으로요."
"씨발...재밌군. 언제?"
"내일 저녁 8시, 북항 지역의 영역 경계입니다."
"좋아. 가지."
강이현이 나가고 난 뒤, 나는 편지에 추신을 적었다.
[P.S. 내일 설원회 보스를 만나. 너는 그가 누군지 안다고 했지. 내가 이미 본 적 있는 사람이라고도 했고. 혹시... 그를 만나면 뭔가 달라지나? 너가 말한 '인간적'이란 게 뭔지 알 수 있을까.]
편지를 접으며 생각했다. 너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비를 보고 있을까. 아니면 너가 말한 대로 그곳은 겨울이라, 눈을 보고 있을까.
너는 누구의 편인 걸까. 태온? 설원회? 아니면... 그저 나, 서태주라는 사람?
*
2024.08.01 수요일 | 오전 9시 43분
서태주
다음날 이른 아침, 어김없이 서랍 안에는 편지가 놓여있다. 평소의 정갈한 필체와는 다르게 다급하게 날려 쓴 듯한 글씨체다.
[가지 마. 아직 만나서는 안돼. 너무 위험해. 네가 죽을지도 몰라. 제발.]
너의 다급한 글씨체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위험하다고?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처음으로 너의 글씨체에서 감정이 느껴졌다. 그동안의 편지들은 마치 관찰자처럼 차분했는데. 이건 마치... 나를 걱정하는 것 같다.
나는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 답장을 썼다.
[왜지? 난 늘 위험 속에서 살아왔어. 그리고 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많은 위기를 견뎌왔는지. 다른 세계의 나는 어땠어? 설원회 보스를 만나서 죽기라도 했나? 아니면... 너가 그를 만나러 갔다가 죽은 적이 있나?]
하지만 나는 그 경고를 무시했다. 너의 말을 들으면 다른 '나'들과 다를 바 없을 것만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