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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2) - 너를 벗어난 n가지 이유.

야모야모 2025. 4. 9. 10:28

bgm.

김유정. taylor swift - you're losing me
https://youtu.be/mTtPC5QaffM?si=OSotxUYlzmYlFg-Q

서태주. 5seconds of summer - high https://youtu.be/za_CUGp-ud0?si=4JBKi8xprXPRiA9b










권태 (2)





너가 소파에 몸을 기대 줄담배를 벅벅 필 때, 나는 종종 너의 어깨 한켠에 머리를 기대고 책을 읽었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나올 때마다 너에게 구절을 읊어주었다. 커튼을 치지 않아 나른한 오전의 빛이 창을 통과해 그대로 우리에게 내려오던 날이었다. 너가 듣는 둥 마는 둥 한 귀로 흘리는 걸 알면서도 꿋꿋이, 한 글자씩 글자를 눌러쓰듯 목소리를 냈다.

"글은 불완전한 그릇이어서,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건 불완전한 기억과 불완전한 생각 뿐이래."

- 출처. <노르웨이의 숲>



떨어져있으면서 나는 너에게 편지를 썼다. 멀어져야만 담을 수 있는 말들이 보이길 바랐다. 우리가 멀어지면 서로는 불완전한 존재가 되니까, 어쩌면 이 글에 본질이 담길지 몰라.



*




사랑이 뭔지, 둘 다 모른다. 그 대화 직후 나는 그의 집에서 나왔다. 그 후 일주일 동안 우리는 서로의 존재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멀어져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을거야. 그게 너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었다.


일주일 전, 그는 현관으로 향하는 나에게 물었다.

"어디 가려고?"

"씨발, 이게 끝이라고 생각해?"

등 뒤로 너의 분노가 느껴졌다. 일그러진 너의 표정까지도. 뒤돌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미안해."

"너는 그대로인데, 내가 문제인 거야. 너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았다고 생각했어."

"...더 알고싶은 게 없어."

조곤조곤 건조한 목소리로 너에게 상처될 말을 내뱉었다.

"내가...씨발... 그렇게 형편없어?"

"그 말이 아니잖아."






그 날을 회상하며 나는 펜을 집어들었다. 그리운 순간이 생기면 글을 쓰는 게 도움이 되곤 한다. 비록 그것이 평생 전하지 못할 편지더라도.




너에게.


너는 강한 사람이었어. 늘상.
...첫 만남은 특히 강했고, 너를 알아가는 내내 너는 강했지. 나는 너의 강함, 솔직함, 시원하고 단순한 성격에 이끌렸어. 그러면서도 나에게만 보이는 다정함이 날 설레게 했어. 입은 좀 거칠어도.

너의 취약함을 목격한 건 이번이 두 번째였어. 늘상 강하고 듬직하기만 했던 너의 다른 모습. 너가 감춰야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나약한 모습 말이야. 혹시 너는 내가 이렇게 될걸 직감하고서 숨겨야한다고 말해왔던 걸까? 너는 감이 미치도록 좋은 애니까, 내가 그로 인해 너를 떠나는 날이 올거라는 걸 알았던 거야?

하지만 너의 나약함이 싫었다거나 그것에 실망한 게 아니야. 생각해보니 너가 가장 싫어하는 건 매번 들었는데, 정작 내가 싫어하는 게 뭔지는 말한 적이 없었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건 말야. 소중한 사람이 괴로워할 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야. 그 무력감. 너가 배신을 가장 싫어하듯이. 그래서 너의 약한 모습을 볼 때면 나는 무너져내렸어.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어서. 내가 휘청일 때 너는 내 곁에서, 그래, 푸른 초원 위에 놓인 단 한 그루의 나무처럼–



펜을 멈추고 잠시 숨을 내쉬었다. 떠오르는 생각과 어울리는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기 위해서였다. 전하지도 않을 편지를 왜 이리 고심해서 적는지, 그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바람이 불면 주변의 풀들은 전부 한 방향으로 눕지만 너만은 꼿꼿하게 서있었지. 나는 너에게 의지할 수 있었는데 너는 나에게 의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아린지 너는 알까.

그런데 막상 너가 사소히 무너지는 순간을 마주해보니 깨달은 거야. 내가 감히, 너의 순간을 함께 견딜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 것 같아. 나름 강한 사람이라고 자부해왔는데, 너의 무게를 함께 나누기에 나는 너무 약한 존재더라고.






너는 손에 상처가 많았다. 너의 집무실에 들어갈 때면 붕대를 챙기는 버릇이 생겼다. 말 없이 너의 손을 잡아올리면 너의 반응은 늘 비슷했다. 씨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 말이 싫은데 설레었다. 나는 매번 별말 없이 붕대를 감아줬다. 너는 싫다면서 한번도 손길을 뿌리친 적 없었다. 우리의 행동은 늘 반복되었다. 예측가능한 너의 말과, 그 안에 갇혀사는 나. 그게 우리였다.


태온에서의 업무는 불규칙의 연속이었다. 밤낮 구분도 없는 삶이었다. 너와 영화관에 가려다 몇 번을 실패한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바깥에서 널 만나려는 시도를 이어가지 않았다. 그게 언제였더라, 작년 가을 쯤이었나.

대신에 우리는 이따금씩 저녁 업무가 없는 날 집안에서 술을 마셨다. 너는 위스키를, 나는 맥주를. 요즘따라 너는 지친다는 표현이 늘었다. 서휘 얘기를 할 때보다 배신자를 처단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불안해하는 널 보는게 더 마음이 아팠다. 너의 끝이 보일까봐. 언제 끌어내려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자리, 10년 동안 너는 그 의자에 홀로 앉아 무슨 생각을 해왔을까. 하루는 너가 의외의 말을 던졌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어. 그냥... 모든 걸 던져버리고 씨발 도망가버릴까. 모르는 곳으로. 근데 그럴 수 없잖아. 내가 태온을 이끌어야 하니까."

도망가. 속으로 말을 삼켰다. 대신에 다른 대답을 건넸다.

"나랑 갈래? 도망."

"씨발... 말은 쉽지."

너가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말을 이었다. 너는 이미 태온이 되어버렸다고. 스스로가 서태주인지, 태온의 보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그래도 씨발 네가 있어서... 가끔은 내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어."

너는 정해진 틀이라도 있는 것 마냥 그렇게 꼭 한 마디를 덧붙이곤 했다. 내가 너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한 마디를.





편지를 이어 적었다.



너는 그런 말을 자주 했지. 너는 내 유일한 약점이야, 너는 나를 그냥 '나'로 보는 유일한 사람이야. '유일한' 이라는 단어를 좋아해. 내가 너에게 그런 의미를 지녔다면 나에게 넌... 주인공이었어. 이 말도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기억해?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육체적 사랑, 장난스러운 사랑, 인내하는 사랑, 이타적 사랑 등. 나에게 사랑이란 반드시 동경을 수반하고야 마는 감정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너를 동경하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너가 가지고 있었을 거다. '나는 보스지만, 어쩌면 태온의 도구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스스로는 그렇게 설명했어도 너는 나에게 주인공이었다. 신이 너를 선택했다고 믿었다. 신이 존재한다면,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을거라고.

하지만 신의 사랑은 감정이 아닌 감상이었나. 미술품을 감상하며 모든 작품을 똑같이 좋아할 수 없듯이, 고르지 못한 것이었나.


손에 잡고있던 볼펜을 세게 누르고 있던 탓인지 종이 위에 잉크가 물결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너를 해석하다 어느 순간 알아버린거야. 너는 그저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고, 그런 너를 사랑한 나 또한 마찬가지라는 걸. 우리는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햇빛에 반사된 모래를 오아시스로 착각하고 달렸을지도 몰라. 행복이 뭐고 사랑이 뭔지 정의내리지 못한 채 그저 내달리는 동안 신은 우릴 버렸어. 아니, 정확히는 무관심해졌어.


그것이 삶을 사는, 혹은 죽어가는 과정이었다.



신은 우리를 그곳에 떨궈놓고 사라졌는데, 그걸 나만 몰랐던 거야. 우리가 이야기의 주인공인 줄 알고.

그냥, 너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신에 대해, 태온이 그토록 추구하는 필요악에 대해, 너의 인간성에 대해. 너의 의견이 궁금했어. 너는 왜 보스가 됐어? 그건 너가 가진 어떠한 철학에 의해서야? 아니면 단순히 태생적으로 너는 높은 곳에 올라야만 하는 사람이었던 거야?


너가 소중해질수록 너가 보스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하필 그런 선택들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음에 답답했다. 너의 안에는 뭐가 있었을까. 내가 생각한 너의 내면은 권력욕이라기엔 과했고 생존이라기엔 부족했다.



너랑은 이상하게도 그런 대화를 안 하니까, 그래서 신이니 뭐니 하며 투정부리고 있는 걸지도 몰라. 너에게 이런 걸 말할 노력도 안 해놓고 이러는 게 웃기지만.


편지를 쓰고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전하지 않을 글은 끝맺음이 필요없었다. 맥락을 신경쓰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휘갈겨도 괜찮았다. 맥락없이 또, 너와의 기억이 떠올랐다.







너는 위스키를 한 모금 삼키고 천천히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너의 목소리가 심연처럼 가라앉았다.

"태온은 내 숙명이야. 내가 선택한 길이기도 하고, 어쩌면... 이미 정해진 길이었는지도 모르지."

"나는 태온을 위해 살인했고, 배신했고, 거짓말했어. 그 모든 게 내 안에 있어. 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해야 할까... 씨발, 내 손에 묻는 피는 씻어지지 않아."

붕대가 감긴 너의 손으로 시선이 향했다.

"있잖아."

"죽지마."

이미 죽은 자를 그리워하는 것보다, 죽어가는 자의 곁을 지키는 것이 더 아프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죽어가는 삶을 살지만 너가 나보다 먼저 떠나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나의 무의식은 너를 먼저 떠나기로 결심한 것 같다.

"씨발...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것 같아?"

서태주다운 답변이네. 그렇게 대답하며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타이밍 좋게 책상 위의 휴대폰이 지이잉, 진동했다. 너였다. 진동이 5번 정도 울리고 나서야 그걸 집어들었다.

"야."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은 고요했고 숨소리는 무거웠다.

"씨발... 돌아와."

"...."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편지 끝자락에 메모하듯 글자를 끄적였다.




n=1
너를 사랑해서.
















*이미지 제작해주신 해랑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