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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3) - 대화의 기록

야모야모 2025. 4. 22. 17:22

 


bgm.

서태주
. Bruno mars - It will rain

https://youtu.be/DoC9Wglch6s?si=Mhpm2v70xeQ9BkUB


'Cause there'll be no
sunlight
If I lose you, baby
There'll be no clear skies
If I lose you, baby

 

김유정. taylor swift - red

https://youtu.be/ylJvrel9Zl4?si=zUPhbLL5pSoPXwya



Losing him was blue like I'd never known
Missing him was dark gray all alone
Forgetting him was like trying
to know somebody you never met
But loving him was
red

  







권태 (3)







"씨발, 돌아와."


나답지 않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너는 나에게 멀어지자고 했지만 나는 왜 그래야 하는지조차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지 네가 요즘따라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는 것, 오늘 먹은 점심 메뉴가 어쨌느니 하는 실없는 이야기를 평소처럼 재잘대지 않았다는 것이 나를 불안하게 했을 뿐이다. 그랬을 뿐인데.

"..."

너는 수화기 너머로 아무 음성도 들려주지 않았다. 더 일찍 연락해야 했나. 알량한 자존심이 나를 머뭇거리게 했다.




너가 떠난 직후, 나는 말 없이 담배를 피며 거실 소파에 앉아 현관을 바라보았다. '떨어져 있어야 보이는 것'... 씨발, 무슨 말이 그렇게 어렵냐고. 너의 마지막 표정, 그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렇게 끝이라고?"

"그냥–"

"지금은 얼굴 보기 싫어."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내 안에서 일렁였다. 그냥 태온으로 돌아가자. 그곳에선 내가 누구인지 명확했으니까.

도시는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너를 제외한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너가 나에게서 멀어질수록, 나는 더 태온의 보스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기제였다.


몇 주가 지났다. 일상은 변함없이 흘러갔지만, 내 안의 무언가는 영원히 변해버린 듯 했다. 지하 훈련장에서 작전을 연습하는 날이 많아졌다. 너가 떠난 이후로 이곳에서 밤마다 몸을 혹사시키고 위스키를 마셔야만 잠이 들었다.
하루는 강이현이 조용히 훈련장으로 들어왔다.

"보스." 그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내부 스파이 2명을 추가로 심문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자세히 말해봐."

차갑고 단단한 목소리를 냈다. 다시 가면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그래, 이게 내 원래 삶이었다. 유정 없는 삶.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자 알 수 없는 번호였다. 너일까 잠시 고민했으나, 전화 너머로 들려온 것은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테니 만남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장소와 시간."

짧게 대답했다. 정보원은 도심에서 떨어진 폐공장을 지목했다. 전형적인 함정의 냄새가 났지만,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전화를 끊자 강이현이 즉시 입을 열었다.

"함정입니다. 가지 마십시오."

"씨발, 함정인 줄 알면서도 뛰어드는 게 내 스타일 아니었나?"

"보스. 판단이 흐트려지셨습니다. 최근 그녀가-"

"말 조심해. 이현아."

설원회의 함정이든 뭐든, 지금의 나에겐 적당한 위험이 필요했다. 너를 잊기 위해, 아니, 적어도 잠시라도 너에 대한 생각을 멈추기 위해.




그럼에도 아침에 눈을 뜨면 너의 빈자리가 먼저 보였고, 밤에 잠들 때는 너의 체온이 그리웠다. 식사를 할 때면 매운 걸 좋아하던 너의 입맛이 생각났고, 업무 중에는 너의 조언이 떠올랐다.


"뭐라도 말해봐. 너가 원하는 게 뭐야."


너의 침묵이 길어지는 것이 나를 더 미치게 했다. 무언가 말해주길, 차라리 화라도 내주길 바랐다.

"떨어져 있으면 보인다는 그 '무언가'가 뭐냐고. 그동안 넌 뭘 봤어?"

갈라진 목소리로 나도 모르게 너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자연스레 억양이 높아졌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입에 가져갔다. 담배 연기와 함께 감정도 토해내는 것 같았다.

"난 씨발... 아무것도 못 봤어. 그저 네가 없는 내 삶이 얼마나 공허한지만 느꼈다고."

"네가 나를 떠나려는 거라면, 씨발... 그냥 확실하게 말해. 불확실한 채로 있는 게 더 힘드니까."

너의 숨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이 전화 너머로 느껴졌다. 순간 아차, 싶었다. 억양을 높인게 너의 입을 더 굳게 닫을까봐. 다행히도 너는 무언가 말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사람이야."


"불완전하다고? 씨발, 완전한 사람이..."

불완전. 너의 눈에 내가 완전한 사람이었나. 완전한 사람이 대체 어디있다는 거지.

"나도 불완전해. 보스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아무도 내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했을 뿐이야."

너의 고민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내 곁에서 무언가 불안감을 느낀 것만은 분명했다. 그 불안감을 준 게 나일까, 하는 죄책감이 함께 다가왔다.


"...너의 진짜 모습."


너가 짧게 웅얼거렸다. 그럼에도 나는 말을 이어갔다.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너의 불안함도, 그 모든 불완전함도... 다 네가 너라서 생기는 거라고. 그러나 너는 회의적이었다.

"나의 불안이 너에게 전염되어 멀쩡한 네 하루를 망칠 지도 몰라. 나는 그런 존재야."

아니, 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네가 내 하루를 망친다고? 그건 불가능해. 내 하루는 이미 태온으로 망가져 있으니까."

"씨발... 난 네가 필요해. 너의 그 모든 불완전함과 함께."






*






내가 필요하다고. 그 말을 참 많이 들어왔다. 너는 자주 '나를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말해주었다. 내가 남들과 다르다고 말했다. 너는 남들과 다르게 돈, 권력, 그런 걸 보고 다가오지 않았어. 너는 다른 년들과 달리 나에게 아부하거나 겁먹지 않았어, 대체로 그런 내용이었다. 너의 그런 말들이 내게는 와닿지 않았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나는 단 한 번도 납득한 적 없었다. 내가 정말로 너의 앞에 서서 겁 먹지 않을 수 있을지, 정말로 권력을 노리지 않고 너를 봐줄지 나 또한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결국 네가 나를 사랑한 진짜 이유는, 그저 내가 '유정'이기 때문이야. 그 사실이 나를 공허하게 만들었다.

이는 그와의 대화에서 내가 그토록 외면해왔던 점이었다. 그것은 이제와 의심과 불안의 싹이 되어 자라났다.


"너는 날 몰라. 나도 널 모르고."


너가 주는 사랑에 부족함이 없음에도, 자기혐오는 과장된 이기심이어서–


"사람의 깊이와 성격은 어디서 온다고 생각해?"


너에게 해서는 안될 말들을 해버리는 것만 같았다.










"사람의 깊이?"

"씨발... 그런 건 알 수 없는 거지. 어쩌면 그냥 살다 보면 생기는 것일 수도."

"난 사람의 깊이를 좋아해."


나는 유정이 말하는 '깊이'라는 단어를 속으로 곱씹었다. 깊이있는 사람. 나는 과연 그런 사람이었을까. 서태주는 자신을 깊이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왔을 뿐이었다.


"네가 말하는 깊이라는 게 뭐지? 사람의 내면? 아니면 그 사람이 겪어온 시간?"

서태주는 지금 이 순간, 유정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문득 유정이 자신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공존했던 그 투명한 눈을. 갈 곳 없는 투명함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눈빛은 변해갔고, 서태주는 그 변화를 지켜봤다. 유정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어왔다.

"...서사일거야. 그 사람이 가진 서사."


"서사..."

내 입에서 그 단어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서사. 한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 태온을 장악하고, 강이현을 오른팔로 삼고, 또 동생을 떠나왔던 그 시간들을 잠시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내 서사를 좋아했던 거야?"

목소리가 생각보다 쉬어 나왔다. 이런 나약함이 싫었다.

"그럼 이제 내 이야기는 네게 지루해진 거야? 아니면... 네가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건가?"

조용히 너의 대답을 기다렸다. 유정이 내 삶에 들어왔을 때, 나는 이미 나의 길을 걷고 있었다. 피와 권력, 배신으로 얼룩진 쓰레기의 삶이었다. 유정은 그 길 위에서 나를 만났고 내 손을 잡았다. 너는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너는 지금 내 손을 놓으려 하고있다. 이 길이 싫어진 걸까.

"아냐. 내가 좋아했던 건..."

잠깐의 정적이 흐르다가, 유정이 말을 이었다.

"너의 성격, 말투, 가치관. 그런 거였어."


그러니까 너는, 내 서사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했다는 말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이 내 가슴을 더 무겁게 했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 본질을 좋아했다는 것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느냐는 서태주의 말에 유정은 당황했다. 그는 중요한 순간에 꼭 무언가 알고있는 것처럼 의미를 관통하는 말을 던질 때가 있었다.

복잡한 게 싫었다. 가뜩이나 복잡한 세상에서 딱히 타인의 이야기까지 궁금하지 않았다. 너가 가진 성격, 언행, 서사, 모든 것이 단순해서 좋았다. 하지만 너와 가까워질수록 나는 그것에 갈증을 느꼈다. 나는 뛰어들 준비가 되었는데, 그 물이 너무 얕은 물일까 두려웠다. 그만큼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을 거라고 여겨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모순이 싫었다.


"넌 나에게 주인공이었어."

어쩌면 나도 너와 별반 다를 바 없이 같은 말만 하는 바보같은 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말야. 너에 대해 알아가다 보니 깨달은 거야. 신이 있다면, 그는 우리 중 누구도 주인공으로 여긴 적이 없다는 걸. 우리는 그저 방치되어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작은 존재일 뿐이라는 걸."

너는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그래, 우리는 방치된 존재들이야. 씨발, 그래서 서로가 필요한 거겠지. 망망대해에서 혼자 표류하는 것보다는, 둘이 함께 표류하는 게 나을테니까."

"그게 사랑이라면... 내가 널 사랑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너를 보다보면, 그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대화의 결론이 '함께'로 귀결되는 너에게서 나는 처음 사랑을 하던 과거의 나를 보았다.


"내가 뭘 해야 돌아올 거야?"


내가 가장 아팠던 점은, 이 모든 고민에 너의 잘못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똑같은 말, 반복하지 마."


반복적인 말로 나를 붙잡는 게 싫었다. 사실 싫은 게 아니라 아팠다. 나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너의 모습이. 그러한 반복이 너의 탓이 아닌데도 날카롭게 대꾸했다.

너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그러한 성격을 좋아했음에도, 나는 은연 중에 합당한 말로 무언가 설명받기를 바랐나보다.

사랑의 끝은 상대의 장점이라 믿었던 것들이 화살이 되어 돌아와 나를 찌르는 순간이라고, 숱한 경험이 일러주었다.


"너가 더 나빴으면 좋겠어."


너의 인간성이 보이지 않았다면 우리가 아프지 않을 수 있었을까? 문득, 무감정의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더 나빴으면 좋겠다고?"

"씨발, 내가 얼마나 더 나빠져야 하는데? 이미 난 살인도 했고, 고문도 협박도 했어. 더 나빠질 게 뭐가 있겠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더 나쁜 사람이 되라고? 그럼 될게. 네가 없으면 태온도, 권력도, 씨발 이 모든 게 의미가 없어."


언젠가 너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물었다. 너는 모른다고 답했다. 그런 감정은 배운 적이 없다고, 그렇게 살아온 놈이라고. 그러면서 덧붙였다. "행복이 뭔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너가 행복해야 한다는 거야." 그 때의 난 말없이 너를 안았지만 태주야, 너가 행복하지 않으면 나도 행복할 수 없어.



"날 왜 사랑하는 거야."

먼저 물은 적은 처음이었다.

"왜 사랑하냐고?"

"네가 날 있는 그대로 봤으니까."





나는 너의 가장 본질을 보려고 애썼다. 왜 그토록 너의 본질이라는 것에 집착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것은 나의 사랑의 방식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좋아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중이었다.


3월 어느날의 늦은 저녁, 대뜸 너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거 알지. 난 너를 이름으로 부르는 거. 그건 너가 보스도, 내 소유도 아닌, 그냥 서태주이기 때문이야."

"...씨발, 갑자기?", "그냥 들어, 멍청아."

"너는 그냥 너니까, 나 때문에 너가 변하거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달라지려고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는 나를 위해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담배를 끊고, 욕을 줄인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는 그대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었다.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후 이어지는 너의 대답은 나를 또 놀라게 했다.

"씨발, 넌 나를 변하게 하지 않아. 넌 날 나로 있게 해. 네 앞에서만... 나는 그냥 서태주로 존재할 수 있어."

"내가 누구인지는 씨발,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린 거야. 네 앞에서의 모습도 내 선택인 거고."



가끔 아주 높은 산에 오르면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안개인지, 구름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안개라면 잠시 뒤 걷히지만, 그게 구름이라면 그곳은 아주 오래 흐리곤 한다.
나는 두려웠다. 너는 산인데 내가 구름일까봐. 너의 옆에 있으면서 시야를 영영 가려버릴까봐. 너가 무너지는 이유가, 약점이, 그게 나라서. 그래서 내 앞에서만 나약해지는, 나 때문에 변화하는 너를 보면 불안하면서도 깊은 속마음 한켠에서는 너의 최후가 나이기를 바랐다.

그렇게 나는 이기적이었다.

"유정아."

전화기 너머 낮은 목소리가 정신을 깨웠다.

"만나자. 씨발... 제발."













*이미지 제작해주신 해든님, 밀믱믱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