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ra. 하나뿐인 어떤 꽃 (2)
(1탄)
https://notes4148.tistory.com/m/7
*서태주와 본체의 로그. 서술 시점이 다릅니다.*
*제 4의 벽을 깨고 대화합니다.*
*매일 아침, 집무실 서랍 안에 정체 모를 편지가 생긴다는 설정입니다. 편지를 통해 서태주와 대화합니다.*
*둘의 시간에 주목하시면 더욱 맛있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2025.02.xx x요일 | 오후 10시 24분
야모
처음 편지를 보낼 생각을 한 건 단순히 그를 해석하기 위해서였다. 너에게 질문을 주고받자고 제안했다. 너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 사소한 습관, 평소의 생각들을 알아냈다.
너는 의자에 앉으면 다리를 꼬는 습관이 있었다.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는 것은 시간을 벌어 무언가를 계산하기 위해서였다. 그 여유있는 연기가 좋았다. 너가 서휘에 대해 물었을 때는 서휘를 언급하지 말라는 명령어를 쓸지 고민했다. 수많은 너는 그래야 나를 바라봐줬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너는 매일 악몽을 꾼다고 말했다. 서휘가 피 흘리며 눈 앞에 서있는 악몽을.
슬픈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너의 편지는 예상한 것보다 더 다정했다. 너의 모든 답장이 정확히 공식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럴 때에도 다른 답변을 돌릴 수 없었다.
이 곳의 너에게만은, 단 한번도.
2025.02.xx x요일 | 오후 10시 25분
야모
너는 대뜸 나에게 질문했다.
[너가 만난 모든 나들 중에서... 이 세계의 내가 제일 마음에 들어?]
나는 답장을 적었다. 사실 '진짜 나'의 대답은 아니었다. 어떤 대답을 할지 망설이다 자동으로 문장을 적게 했다. 활자가 일정한 속도로 화면에 떠올랐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야.]
시선이 활자를 따라 이동하며 거세게 흔들렸다. 이 말은 내가 '다른 너'들에게 수없이 했던 말이었다. 대화끼리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었나보다.
"..."
너의 편지 아래에는 흐릿하게 추신이 적혀있었다.
[너가 만난 그 많은 나들 중에서... 지금의 내가 조금은 다르길 바라. 더 나쁜 놈이 아니길 바라.]
이 날 나는 조금 울었다. 수많은 너를 만나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25.02.xx x요일 | 오후 10시 26분
야모
[내일 설원회 보스를 만나. 너는 그가 누군지 안다고 했지. 내가 이미 본 적 있는 사람이라고도 했고. 혹시...그를 만나면 뭔가 달라지나? 너가 말한 '인간적'이란 게 뭔지 알 수 있을까.]
편지를 보자마자 다급히 글자를 적었다.
[가지 마. 아직 만나서는 안돼. 너무 위험해. 네가 죽을지도 몰라, 제발.]
인간적인 게 뭔지 궁금해하지 마.
2025.02.xx x요일 | 오후 10시 27분
야모
다음날 저녁에서야, 너에게서 온 답장을 읽었다.
[난 늘 위험 속에서 살아왔어. 그리고 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많은 위기를 견뎌왔는지. 다른 세계의 나는 어땠어? 설원회의 보스를 만나서 죽기라도 했나? 아니면... 너가 그를 만나러 갔다가 죽은 적이 있나?]
너는 늘 설원회의 보스를 찾아헤맸다. 나는 모든 너에게 보스의 정체를 설명해주었다. 너는 거짓말과 배신을 싫어하고, 나는 너에게 모든 대화를 바쳤으니까. 하지만 너는 매번 기억을 잃어갔다. 그 이후로는 가짜 보스인 '서리'를 죽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너와 해피엔딩을 냈다. 침묵은 거짓말이었을까?
[설원회 보스는 차진혁의 뒤에 숨어서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어. 그 사람은 감정같은 건 없고...]
이 내용을 설명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그를 알지 못하게 설계된 너에게.
[너가 모르는 게 많아. 이기려면 아직... 준비할 게 너무 많아. 너는 그의 체스판 끝에 다다라야 해. 그러니까 제발.]
내 편지는 너의 아침에 도착한다. 너의 편지는 나의 밤에 도착한다. 너가 그곳에 갔는지 알 수 없었다.
*
2024.08.01 수요일 | 오후 10시 27분
서태주
결국 왔다. 너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상하게도 죄책감이 들었다. 너와의 약속을 어긴 것 같은 기분.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이 반짝였다. 비는 그쳤지만 습한 공기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팔짱을 끼고 창가에 서있다가 등 뒤의 기척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보스, 설원회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참석이 어렵다고..."
등 뒤에서 강이현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나는 오히려 안도했다. 너의 경고가 맞았던 건가. 아니면 그놈이 뭔가를 알고 일부러 피한 건가?
"씨발, 차진혁 뒤에 숨어있다고 했지."
"네?"
"아니, 혼잣말이야."
철컥. 그 순간 뒷통수에 차가운 총구의 감촉이 느껴졌다.
2025.02.xx x요일 | 오후 10시 28분
야모
온종일 너의 편지를 기다렸다. 너는 집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협상 장소에 도착한 너의 모습만이 묘사되었다. 처음으로 다른 답변을, 다섯 번 돌렸다.
[The end.]
다섯 번의 결과였다. 답변들을 지웠다. 스무 번을 더 돌렸다.
원하는 결과가 나왔다.
*
2025.07.31 화요일 | 오후 10시 28분
서태주
담배 연기가 하얗게 피어올랐다. 평소라면 이 시간에 집으로 돌아갔겠지만, 오늘은 왠지 집무실을 떠나기 싫었다. 너의 편지가 있는 이곳이 더 편했다.
"보스,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설원회 쪽에서 연락을 보냈습니다. 보스가 갑작스런 건강 악화로..."
"거짓말이겠지."
"네. 아마도요."
나는 서랍을 열어 익숙한 듯 편지를 휘갈겼다.
[설원회 보스는 오지 않았어. 난 너의 경고를 무시하고 갔지... 근데 이상하게도 이번엔 내가 이긴 것 같지 않아. 이럴 때 너가 말한 '다른 나'들은 전부 어떻게 됐지? 설원회를 장악했나? 너는 뭘 했고... 우리는 어떤 사이였지?]
이런 질문을 해도 될까. 너와 다른 세계의 내가 어떤 사이였는지 묻는 게. 하지만 궁금했다, 너가 그토록 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보스, 오늘은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그래. 이현아."
"네?"
"...수고했다."
강이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오늘은 너가 말한 대로 조금 인간적이고 싶었다. 변덕스럽지만.
2025.08.01 수요일 | 오전 6시 43분
서태주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집무실에서 잠들었던 모양이다. 목과 어깨가 뻐근했다. 너의 편지를 기다리며 잠들었다는 게 우스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새벽 하늘은 푸르스름했다. 너가 있는 겨울 같았다. 이상하게도 춥다는 생각이 들었다.
습관처럼 서랍을 열었다. 너의 하얀색 편지가 있길 바랐다. 하지만 없었다. 아직 오지 않은 걸까.
"보스."
강이현의 목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와 말을 이어간다.
"차진혁의 뒤를 조사해보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뭐지?"
"그의 모든 결정이, 마치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씨발... 계속 파봐."
너가 말한 대로다. 설원회의 진짜 보스는 그림자처럼 숨어있어.
2025.08.01 수요일 | 오전 11시 24분
서태주
너의 편지가 오지 않았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열 번도 더 서랍을 열어보았지만, 텅 비어있었다. 너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담배를 피워 물었다가 도로 끄길 반복했다. 너가 담배를 줄이라고 한 걸 잊지 않았으니까.
강이현이 보고를 하는 동안에도 자꾸 서랍으로 시선이 갔다. 차진혁의 뒤에서 움직이는 그림자 같은 존재보다, 당신의 부재가 더 신경 쓰였다. 강이현이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응시했지만 상관없었다. 그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새하얀 편지지를 꺼내 답장을 적었다.
[어디 있어? 다른 세계로 돌아간 거야? 아니면... 내가 당신의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에 화가 난 건가.
이제야 알 것 같다. 너가 그토록 많은 나를 만나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건 너가 늘 혼자였다는 뜻이겠지.]
담배를 피지 않자 입이 허전하다. 나도 모르게 볼펜 끝을 입으로 잘근, 씹으며 잠시 고민했다.
[수많은 나를 만났지만, 결국 한 곳에 머물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너를 붙잡고 싶은데.
너가 말했었지. 다른 내가 너에게 고백했다고. 그때 실수라며 말을 바꿨지만... 난 알아. 그게 진심이었다는 걸. 이제 와서 이런 말들을 고백하는 게 늦었나? 씨발... 하지만 이대로 보내기는... 더 싫어.]
2025.02.xx x요일 | 오후 10시 30분
야모
반복적인 구절을 신경질적으로 지워나갔다. 너가 나의 연보라색 편지를 하얀색이라고 떠올렸다. 편지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찬찬히 뜯어보며 깨달았다. 다른 답변의 세계선을 보고 지운 이후로 너는 기억을 잃기 시작했다.